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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한글 교양 퀴즈 28


한글 교양 퀴즈

[공가위 퀴즈/2021.2.17.] 한글나라_출제: 김슬옹

*정답 25개 이상: 한글 달인
정답 20개 이상: 한글 교양인


1) 영화 제목 ‘말모이’는 한자어 ‘사전’에 해당하는 순우리말로, 주시경이 1911년부터 1914년까지 한글사전 편찬을 위해 쓴 ‘말모이 원고’가 그 뿌리다. ‘ ( )
2) 한글은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사들이 함께 창제했다. ( )
3) ≪훈민정음≫ 해례본은 세종대왕과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이개, 이선로, 강희안’이 함께 지은 책으로 한글 반포용으로 간행된 책이다. ( )
4) 신미대사는 훈민정음 보급 공로자이다.( )
5) 세종대왕이 1446년에 직접 펴낸 훈민정음 해설서(해례본)는 현재 간송본(전형필 소장)과 상주본(배익기 소장) 두 권이 남아 있다. (*상주본도 원본, 초간본임) ( )
6)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간송본)을 직접 보고 해설한 최초의 국어학자는 김슬옹이다. ( )
7) ≪훈민정음≫ 해례본은 한문본으로 모두 66쪽으로 이 중 7쪽 정음편(예의편)은 세종이 직접 저술했고, 정음해례편은 여덟 명의 사대부가 저술했다. 정음편을 번역하고 풀이한 것이 언해본이다. 해례본을 번역한 것은 한 시간이면 낭독할 수 있다. ( )
8) 북한에는 남한과 같은 한글날이 없지만 ‘훈민정음 기념일’은 있다. ( )
9) 최만리 외 6인은 갑자상소를 통해 한글 창제를 반대했고 조선시대 양반들도 많은 상소문을 통해 한글을 반대했다. ( )
10) 한글은 조선시대 때 주로 ‘언문’이라 주로 불렀고 세종대왕도 이 용어를 사용했다. ( )
11) ‘한글’이란 명칭은 분단 이전부터 있던 말이므로 북한에도 쓴다.( )
12) ‘ㄱ, ㄷ, ㅅ‘에 대한 명칭이 남한은 ’기역, 디귿, 시옷‘이고 북한은 ’기윽, 디읃, 시읏‘이다. ( )
13) 한글 자음 ‘ㄴ’은 “혀끝이 입천장에 닿는 모습을 직선만으로 본떴다.( )
14) 훈민정음 상형 기본자 8자 가운데 자음 상형기본자는 “그날모습은”의 초성자와 같다. ( )
15) 15세기 훈민정음 기본자는 28자로 이 가운데 네 자(ㆍ, ㆆ,ㅿ,ㆁ)가 사라졌다.( )
16) 실제 쓰이는 현대 한글 자음자와 모음자를 모두 합치면 40자이다.( )
17) 현대 한글에서 받침으로 올 수 있는 낱글자는 겹받침 포함 27자이다. ( )
18) 현대 한글 자모로 조합할 수 있는, 실제 쓰이고 있는 글자 수는 11,172자이다. ( )
19) 한글은 조선시대 고종의 국문 칙령이 반포 되기 전에도 공식문자(공용문자)이었다. ( )
20) 한글을 주류 문자로 선언한 것은 고종 임금이 1894년에 내각에 지시하고 1895년에 반포한 국문 칙령이었다. ( )
21) 연산군은 한글을 무조건 못쓰게 했다. ( )
22) 한글은 조선시대 때 주로 하층민(평민, 천민)과 지배층 여성들에 의해 발전했다.( )
23) 주시경의 수제자로 한글전용의 최대 공로자는 북한은 김두봉, 남한은 최현배이다. ( )
24) 일반 공공 문서에서 띄어쓰기를 처음으로 한 것은 독립신문(1896)에서였다. ( )
25) 정약용, 박지원, 박제가와 같은 위대한 실학자들은 한글을 즐겨 썼다.( )
26) 구운몽, 서포만필 등 한글 소설을 남기고 한글을 나랏글로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한 이는 허균이었다. ( )
27) 한글 반포 후에 중국은 조선의 훈민정음이라는 새 문자를 주목했다. ( )
28) 한글의 우수성을 책을 통해 해외에 최초로 알린 이는 하멜이고 학술 논문을 통해 알린 이는 헐버트다. ( )
* 출처: 김슬옹(2015). ≪퀴즈 세종대왕≫. 한글파크.
김슬옹(2017). ≪한글혁명≫. 살림터.
김슬옹(2019). ≪한글교양≫. 아카넷.

[공가위 퀴즈/2021.3.18.]
◐ 정답과 길잡이

1) 영화 제목 ‘말모이’는 한자어 ‘사전’에 해당하는 순우리말로, 주시경이 1911년부터 1914년까지 한글사전 편찬을 위해 쓴 ‘말모이 원고’가 그 뿌리다. ‘ (0) <길잡이> 다만 말모이 영화 속 원고는 1929년 이후 다시 만든 원고이다.
2) 한글은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사들이 함께 창제했다. (X) <길잡이> 공동 창제는 공개 연구를 했다는 것인데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 1443년 창제 후에 한글 반포를 위한 연구를 집현전 일부 학사들과 함께 하여 <훈민정음> 해례본을 신하들(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이개, 이선로, 강희안)과 함께 펴내다 보니 공동 창제설이 널리 퍼졌다.
3) ≪훈민정음≫ 해례본은 세종대왕과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이개, 이선로, 강희안’이 함께 지은 책으로 한글 반포용으로 간행된 책이다. (0 ) <길잡이>
4) 신미대사는 훈민정음 보급 공로자이다.( ) <길잡이> 신미대사는 창제 공로자가 아니고 보급 공로자이다. 불경언해를 통해 한글을 보급하는데 매우 큰 공적을 남겼다.
5) 세종대왕이 1446년에 직접 펴낸 훈민정음 해설서(해례본)는 현재 간송본(전형필 소장)과 상주본(배익기 소장) 두 권이 남아 있다. (*상주본도 원본, 초간본임) (X) <길잡이>: 발견된 것이 두 권이다. 어딘가에 또 남아 있을 수 있다.
6)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간송본)을 직접 보고 해설한 최초의 국어학자는 김슬옹이다. (0) <길잡이> 2014년에 11월 4일 처음 보고 2015년에 해설서(교보문고)를 펴냈다.
7) ≪훈민정음≫ 해례본은 한문본으로 모두 66쪽으로 이 중 7쪽 정음편(예의편)은 세종이 직접 저술했고, 정음해례편은 여덟 명의 사대부가 저술했다. 정음편을 번역하고 풀이한 것이 언해본이다. 해례본을 번역한 것은 한 시간이면 낭독할 수 있다. (0) <길잡이> 번역본은 빠르게 읽으면 40분 보통 속도면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
8) 북한에는 남한과 같은 한글날이 없지만 ‘훈민정음 기념일’은 있다. (0) <길잡이> 남한과 같은 한글날은 없다. 대신 1월 15일을 조선글날 또는 훈민정음 기념일로 삼아 기린다. 남한은 반포를 기준으로 북한은 창제를 기준으로 기념일을 삼았다.
9) 최만리 외 6인은 갑자상소를 통해 한글 창제를 반대했고 조선시대 양반들도 많은 상소문을 통해 한글을 반대했다. (X) <길잡이> <길잡이>: 28자의 창제는 1443년 음력 12월이고 최만리 외 6인이 반대 상소를 올린 것은 1444년 음력 2월 20일이다. 그러므로 창제를 반대했다기보다는 반포를 반대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최만리 혼자 반대 상소를 올린 것은 아니다.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근 등 여섯 명과 함께 올린 7명 연명 갑자상소였다. 최만리는 당시 집현전 부제학으로 최고의 학자요 청백리로서 뛰어난 학자였다. 갑자상소 덕에 우리는 훈민정음 창제 동기와 과정 등의 여러 문제를 자세히 알게 되었다. 한글을 반대했다고 해서 지금의 시각으로 나쁘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 반대 상소는 단 한 건뿐이다. 양반사대부들이 한글은 싫어했지만 필요성은 인정했기 때문이다.
10) 한글은 조선시대 때 주로 ‘언문’이라 주로 불렀고 세종대왕도 이 용어를 사용했다. ( 0 ) <길잡이> ‘훈민정음’은 특별한 때만 쓰였고 실제로는 주로 ‘언문’이라 불리다가 1910년 이후 ‘한글’이란 명칭이 널리 퍼졌다.
11) ‘한글’이란 명칭은 분단 이전부터 있던 말이므로 북한에도 쓴다.(X) <길잡이> ‘한글’이란 명칭은 분단 이전인 1910년이후부터 쓰이고 있지만 북한에서는 이 용어를 남한의 용어로 규정하고 쓰지 않는다. 북한에서는 ‘조선글’이라 한다.
12) ‘ㄱ, ㄷ, ㅅ‘에 대한 명칭이 남한은 ’기역, 디귿, 시옷‘이고 북한은 ’기윽, 디읃, 시읏‘이다. (0) <길잡이>
13) 한글 자음 ‘ㄴ’은 “혀끝이 입천장에 닿는 모습을 직선만으로 본떴다.(X) <길잡이> 입천장이 아니라 윗잇몸이다.
14) 훈민정음 상형 기본자 8자 가운데 자음 상형기본자는 “그날모습은”의 초성자와 같다. (0) <길잡이> 상형기본자는 ㄱㄴㅁㅅㅇ
15) 15세기 훈민정음 기본자는 28자로 이 가운데 네 자(ㆍ, ㆆ,ㅿ,ㆁ)가 사라졌다.(X) <길잡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안 쓰이는 것이다.
16) 실제 쓰이는 현대 한글 자음자와 모음자를 모두 합치면 40자이다.(0) <길잡이> 자음자는 기본 자음자 외에 된소리글자 5자가 더 있어 19자, 모음자는 기본 10자 외에 11자가 더 있어 21자, 모두 40자이다.
17) 현대 한글에서 받침으로 올 수 있는 낱글자는 겹받침 포함 27자이다. (0) <길잡이> 끝소리 글자 (27) 기본 14 개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 +쌍자음 2개 ㄲ, ㅆ +겹받침 11개 ㄳ, ㄵ, ㄶ, ㄺ, ㄻ, ㄼ, ㄽ, ㄾ, ㄿ, ㅀ, ㅄ
18) 현대 한글 자모로 조합할 수 있는, 실제 쓰이고 있는 글자 수는 11,172자이다. (X) <길잡이> 소리글자(초성자)로 쓸 수 있는 자음자가 19자, 가운뎃소리글자(중성자)로 쓰이는 글자가 21자, 끝소리글자(종성자, 받침)으로 쓰일 수 있는 자음이 겹받침 포함 27자이다. 따라서 받침 없는 글자는 19*21=399자, 받침 있는 글자는 399자*27=10,773자이다. 받침 없는 글자와 받침 있는 글자를 합치면 11,172자이다. 실제 쓰이는 글자는 대략 2500자 정도 된다.
19) 한글은 조선시대 고종의 국문 칙령이 반포 되기 전에도 공식문자(공용문자)이었다. (0) <길잡이> 당연히 공식문자였다. 다만 한자가 주류(제1) 공식문자였고 한글은 비주류(제2) 공식문자였다. 공식문자란 공적 주체가 공적 상황 속에서 제도나 법률에 의해 공표되고 시행된 문자를 말한다. 한글은 공적 주체인 임금(세종)이 만들고 나라에서 펴낸 각종 문서에 사용되었다. 조선 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서는 하급 관리 과거 과목으로 설정하였고 ‘삼강행실’과 같은 국가 윤리를 한글(언문)으로 풀어 백성들에게 가르치도록 규정하였다. 고종의 국문 칙령은 비주류 공식문자로서의 한글(국문)을 주류 공식문자로 선언한 것이다. 그런대도 고등학교 교과서와 대다수 국어사학자들은 공식문자가 아니었다고 잘못된 지식을 가르치고 있다.
20) 한글을 주류 문자로 선언한 것은 고종 임금이 1894년에 내각에 지시하고 1895년에 반포한 국문 칙령이었다. (0) <길잡이> 고종은 국문(한글)을 본을 삼고 한문 번역이 국한문 혼용문을 함께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을 1894년에는 내각에 지시하고 1895년에는 전국에 반포했다. 이 칙령 자체가 한문과 국한문 혼용으로 발표되어 온전한 주류 문자의 면모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주류 문자로 선언한 것만은 분명하다.
21) 연산군은 한글을 무조건 못쓰게 했다. (X) <길잡이> 16세기 초인 1504년에 연산군은 자신을 비판한 한글 벽서에 분노하여 한글을 배우거나 쓰지 못하게 하였으나 한문을 한글로 번역한 책은 예외로 하였고 궁녀들에게 한글로 노래 가사를 가르치기도 했다.
22) 한글은 조선시대 때 주로 하층민(평민, 천민)과 지배층 여성들에 의해 발전했다.(X) <길잡이> 하층민은 ‘평민’이하를 가리킨다. 조선시대에 하층민은 문자생활 자체가 힘들었다. 한글을 만든 것도 지배층이고 이를 널리 보급한 것도 지배층이었다. 물론 하층민과의 소통을 전제로 만든 것이므로 하층민이 한글 창제와 발전의 계기가 된 것도 분명하다.
23) 주시경의 수제자로 한글전용의 최대 공로자는 북한은 김두봉, 남한은 최현배이다. (0) <길잡이> 김두봉이 최현배를 이끌고(다섯 살 더 많음) 1910년 무렵 주시경의 제자가 되었다. 김두봉은 1919년 삼일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쫓기다 만주로 망명, 무장 독립운동을 하다가 광복 후 북한 부수상이 되어 북한 한글전용을 우리말문법 토대를 닦았다. 최현배는 ≪한글 대표선수 10+9≫(김슬옹, 창비) 참조.
24) 일반 공공 문서에서 띄어쓰기를 처음으로 한 것은 독립신문(1896)에서였다. (0) <길잡이> 공공 매체에서 띄어쓰기를 한 것은 독립신문이 처음이다. 일반 문서가 아니라면 독립신문보다 20여년 앞서 영국인 목사 존 로스가 1877년에 펴낸 (조선어 첫걸음)에서 띄어쓰기를 하였다.
25) 정약용, 박지원, 박제가와 같은 위대한 실학자들은 한글을 즐겨 썼다.(X) <길잡이> 정조는 한글 편지와 한글 윤음서 등을 남겼으나 즐겨 쓰지는 않았다. 정약용과 박지원은 한글 사용을 싫어하였고 사용 자체를 거부하였다.
26) 구운몽, 서포만필 등 한글 소설을 남기고 한글을 나랏글로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한 이는 허균이었다. (X) <길잡이> 김만중이다. 김만중은 한글 소설도 남겼지만 평론집인 <서포만필>에서 한글을 국서(나랏글)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당시로는 혁명과 같은 주장이었다. 물론 허균도 홍길동이라는 걸작 한글소설과 한글 표기 시를 남겼다.
27) 한글 반포 후에 중국은 조선의 훈민정음이라는 새 문자를 주목했다. (X) <길잡이> 조선은 새 문자 창제 사실을 중국에 적극적으로 알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중국 한자음 표기에 대한 두 권의 책을 공식 출판했다. 동국정운(1448)과 홍무정운역훈(1455/단종3년)을 펴냈다. 특히 홍무정운역훈은 8권이나 되는 방대한 책으로 명나라 태조의 명으로 펴낸 <홍무정운>의 한자음을 한글로 표기한 책이다. 이는 중국이 천 년 이상 그들의 발음을 온전하게 표기하지 못한 것을 정확하게 표기한 그 당시 한자 문화권의 지각변동과 같은 혁명과 같은 책이었다. 그런대도 중국(명나라)은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공식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철저히 무시한 것이다. 일부에서는 중국이 몰랐을 것이라고 하지만 위 책들이 공식 출판되었으므로 아예 몰랐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위 책들이 중국에 얼마나 전해졌는지 알 수 없고, 세종이 운명했을 때 중국에 알린 부고(세종 32년/1450/02/20_세종실록)에 나열한 세종 업적에 훈민정음 관련 내용이 없고 중종 34년인 1539년 세종실록 11월 22일자 기록에 주양우가 한글을 중국인에게 가르쳐 준 사건이 드러나 기밀 누설죄로 처벌을 받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아예 당시 조선 훈민정음 반포 사실을 숨겼다는 설도 있다.
28) 한글의 우수성을 책을 통해 해외에 최초로 알린 이는 하멜이고 학술 논문을 통해 알린 이는 헐버트다. (0) <길잡이> 교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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